꼬꼬무 장사 상륙작전 재방송 보러가기 | 작전명령 174호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3회 6월 23일 게스트 솔지 폴킴 박효주 SBS 온에어 실시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꼬꼬무 33회 <작전명령 174호 –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편은 오는 6월 23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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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33회 작전명령 174호 –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 편에서는 장사 상륙작전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니다.
장사 상륙작전은 6.25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이었던 1950년 9월 15일에 인천 상륙작전 실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기만작전의 일환으로 실생된 작전입니다.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되었으며 학도기간대원으로 구성된 육본 독립 제1 유격대대 772명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작전입니다.
9월 15일 새벽 05시경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 수송을 맡은 LST 문산함이 좌초하고 다수의 탄약을 유실하는 등 작전 개시 초반부터 난관에 빠졌으나, 악전고투 끝에 09시경 전 대대가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주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9월 19일 구조작전이 진행되어 철수할 때까지 전사 139명, 포로 39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4일 넘게 방어를 지속하여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 동부의 북한군 전력 약화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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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장사 상륙작전
상륙작전 자체의 엉성함과 예정을 훨씬 넘겨서 지속된 전투, 부실한 지원과 병력 열세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로만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습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적군 보병무기를 노획해서 전투에 활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는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당한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방어태세 약화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동해안에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적이 오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보급로 및 퇴로 차단 위기에 직면한 북한군은 팽팽한 낙동강 전선, 특히 포항-경주 축선의 형산강 방어선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빼내어 장사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인천 상륙작전에 발맞춰 전면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보다 쉽게 북한군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후일 참전용사들의 유격동지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서를 보내 유격대원들의 헌신을 치하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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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상륙작전은 적 후방 교란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당장 전멸해도 이상할게 없는 악조건에서 부대원들이 엄청난 혈전을 벌인 끝에 이룩한 것이며, 작전의 구성이나 지원 면에서는 상태가 매우 열악했습니다.
애초에 학도병을 전선에 투입시켰다는 것에서부터 문제인 것이 소년병의 투입으로 현대 기준에서 전쟁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부대원의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습니다.
즉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흩어져서 와해되거나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기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수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하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며칠간 혈전을 벌인 것입니다.
또한, 지급된 전투복과 무기는 모두 노획물자였습니다. 당시 한국군에도 무기를 비롯한 물자가 모자랐다는 사정이 있고 노획무기는 적지에서 탄약을 노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원이 미흡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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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6월 23일 방송
그리고 유사시 지원대책에 대한 사전 준비도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당장 상륙선이 좌초하면서 무전기가 바닷물을 먹어서 상태가 영 안좋더니 곧 고장나서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비로 쓸만한 함선도 없어서 문산호가 좌초되자 대신 이들을 구출할 함선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으며, 구출에 나선 조치원호를 근접 호위할 전력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덕분에 조치원호 근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40여 명이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3일 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딱 3일 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륙 당시의 혼란 및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모자르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무려 4일 간이나 버틴 것이 기적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상륙 후에나마 미 해군의 95.2기동전단이 발 벗고 달려와 화력 지원은 물론, 식량과 탄약도 일부 보급해준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미 해군 순양함, 구축함의 지원이 없었으면 전투력이 빈약한 유격대대는 철수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북한군의 반격에 전멸했을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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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33회 게스트 솔지 폴킴 박효주
이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운 셈입니다.
부대원들은 장사 상륙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돼서 자신들이 거기 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부대원들은 11월 말까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서 적 패잔병 소탕 임무에 종사하다가 12월 19일 자로 서울에서 부대가 해체되고 일부 인원은 장교 지원, 대부분은 사병으로 2사단 32연대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부상으로 입원해 있던 이명흠 부대장이 나중에 이를 알고 극력 항의했으나 조치는 되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 작전이 있었던 영덕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한켠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과 전승기념공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에는 동해선 장사역이 개통하여 동해안을 낀 휴양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 날 방송되는 33회 <작전명령 174호 –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편에서는 솔지, 폴킴, 박효주가 게스트로 출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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